풍류를 아는 섬소년의 사업 유랑기 – 하메식당 6화

하메식당: WE ALL HAVE A STORY TO TELL
행복의 순간을 만드는 사람들, 하우투메리 멤버 한 사람을 위해 열리는 식당입니다. 매주 목요일 하루, 저녁 7-9시의 식사만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음식과 피플 다큐멘터리, 하메식당을 시작합니다.

 

 

 

6화. 돈키호테와 마시는 고량주의 맛, 김종길

그날 예약은 남달랐다. 

편한 음식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돌아온 첫마디. 

“제가 좀 나이가 있어서” 

갑자기 재현님과 식사 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우투메리에 남다른 어르신 한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 

편한 방석이 있나 하고 작은 가게를 빙 둘러보았다. 

“네네 어떤 음식이든 괜찮으니 말씀해주세요” 

“아 그럼 연태에 어향가지 어떨까요.” 

어? 평범한 어르신은 아니구나.

국밥이나 쌈밥을 기대했던 나는 예기치 않은 주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 중 하나, 어향가지와 고량주. 

어느새 어르신 취향이 되어버린 건가 하고 생각도 잠시, 입 안에는 군침이 한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오 네네 당연하죠! 시간 맞춰서 오시면 맛있게 준비해둘게요.” 

어향가지와 고량주를 되뇌며 돌아서는데 왠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이야 말로 하메식당에 찐한 인생이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이.


 

그럼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쑥스럽네요. 하우투메리에서 CVO(미래전략이사)를 맡고 있는 김종길입니다. 상돈 님과 연을 맺고 하우투메리와 함께한지도 벌써 6년이나 됐네요.

종길 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분들에게 에피소드를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걱정이 되는데. 워낙 제가 나이가 많은 편이라 에피소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웃음) 

어느 정도 많으신지 여쭤봐도…

회사에 어린 친구들이 많아서 그렇지…. 40대 후반 정도밖에 안됐어요. 

에? 전혀 그렇게 안보이시는데요?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오늘 뭐든지 얘기해드릴 테니 (웃음)

정말 기대되는데요. (웃음) 아. 식기 전에 드세요.  

회사 친구들하고 자주 같이 먹는 메뉴인데, 하메식당에서도 될지 몰랐습니다.

저도 워낙 좋아해서요. 종길 님 오시기만 기다렸습니다. (웃음)

우주에 갈 생각 정도는 해야 사업을 하지

그럼 어떻게 하우투메리에 조인하시게 되었어요? 

2002년부터 일곱 번째 사업으로 웨딩 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워낙 산업 자체가 폐쇄적이고 음성적이라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거든요. 여러 IT 서비스를 시도해봤는데 결국 ERP 개발과 웨딩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으로 결론을 내고 매진했었죠. 시작한 지 8년 째정도 됐을 때 시대가 점차 변하더라고요. 웹에서 앱으로 모든 플랫폼이 전환되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리고 또 하나. 당시 똑똑한 젊은 친구들이 모여 스타트업이라는 걸 만들더라고요. 당시에 회사 내부에 문제도 좀 있고 해서 큰 기로에 놓이게 되었어요. 내가 다음 변화에 발맞춰 끌고 나갈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게 된거죠.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는 똘똘한 친구들과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나는 수익을 내는 법인이 있고, 또한 업계 경험과 네트워크가 있으니 그런 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확실했고요.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 하기 힘든 생각일 것 같은데. 대단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래서 웨딩 시장에서 스타트업하는 친구들이 누굴까 하고 찾아서 다 만나봤어요. 당시 네 팀 정도 있었는데 그때 한 팀이 지금 하우투메리 대표인 상돈 님이었어요. 벌써 한 6년 전쯤 된 것 같은데 그때는 하우투메리도 아니었고 스냅 작가들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한창 운영하고 있을 때였어요.

상돈 님의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솔직히 말하면 깜짝 놀랐어요. 아니, 웨딩 사업한다는 사람들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나왔더라고요. 

저커버그 “내 패션은 베스트 서비스 위한 것” (for 상돈님)

대표적인 스타트업 복장이신데요?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점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조금만 얘기를 나눠봐도 이 사람은 정말 논리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비즈니스를 진짜 해보고 싶어 하는 욕구가 느껴지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상돈 님의 포부였는데, 웨딩 사업은 시작이고 결국은 우주 관련 사업을 하는 게 목표라고 하더군요. 

우주요? 한국의 일론 머스크…

되게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그 점이 참 맘에 들었어요. 젊은이가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기존 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 있지, 하고 생각했거든요. 큰 그림을 그리면 최소한 그 근처는 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나서 자연스레 내가 걸어온 길을 얘기하게 되었고. 30분 정도 긴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그리고 다음 날인가. 상돈 님이 전화가 왔어요. 합류하셨으면 좋겠다고. 그날 이후로 시작한 게 벌써 6년이네요.

항상 육지가 궁금했던 섬소년

종길님의 고향, 보길도

듣다 보니 종길 님이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궁금해요. 30년간 전국을 거쳐 상경한 섬 출신이라고만 들었거든요. 

거기서부터 얘기하려면 나이만큼 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혹시 어부사시가에 나오는 보길도라고 알아요? 제주도 위에 있는 섬인데. 정말 시골 중에 시골이에요.

태어났을 때는 전기도 없던 동네라 호롱불을 켜고 살았고 해변의 모래는 너무 아름다운 은빛에, 해삼이나 멍게도 잡아서 바로 먹을 만큼 신선했어요. 그만큼 자연이 놀이터였던 곳이지요.  

그때도 그런 곳이 있었군요.  

지금 도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것 같긴 해요. 그 시절이 정말 좋았거든요. 섬이라 해산물이 많아 먹을 게 부족하지도 않았고 밤에는 반딧불을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마을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어요. 어찌나 신기하던지. 문명이 이런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런 변화들이 동네에 하나씩 늘어가니 점점 육지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질 수밖에 없었지요. 저 바다를 건너면 무엇이 있을까 하고. 

그때는 봄이 되면 겨울에 왔던 철새들이 마을을 떠났는데 그 철새를 가장 부러워했어요.

그럼 언제 처음 육지로 나가셨어요. 

중학교까지는 섬에 살았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육지로 유학을 갔거든요. 광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하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광주까지 가려면 보길도에서 앞섬에 가는 데 40분, 목포까지 6시간 동안 배를 탄 뒤에 또 3시간을 버스를 타야 도착해요. 그렇게 첫 육지 생활을 시작했지요. 

인생의 의미를 직접 찾아야만 했던 그 시절, 광주

처음 경험하는 육지 문명에 깜짝 놀라셨겠네요. 

와 충격이었죠. 공중전화를 처음 봤는데 어떻게 전화를 거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콩나물시루 같은 통학버스를 타고 하숙집에서 학교까지 다니면서, 대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2학년 때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됐어요. 이한열 열사가 우리 학교 선배였거든요. 그 사건이 이후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죠.

와. 그때의 광주에 있으셨군요저는 근현대사 교과서로만 배웠던 얘긴데.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광주는 심각했어요. 늘 최루탄이 도시에 뿌려졌고 담임선생님한테 오늘 데모하는 날이라고 하면 오전에 수업 마쳐주시기도 하고 그랬을 때니까요. 그때 받은 다양한 충격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죠.

학교 생활이 스펙터클 하셨겠네요. 

그렇죠. 그때는 또 교육과정 자체가 모든 게 암기일 때였고, 옛날이라 선생님들은 좋은 대학을 가야 삶이 바뀐다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했었어요. 근데 때가 때인지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유를 못 찾겠더군요. 그래서 고2 때 1년 휴학계를 썼죠.

고등학교 휴학은 난생처음 듣는데요. (웃음) 그럼 휴학하고는 뭘 하셨어요? 

한 해동안 목포에서 생활을 하면서 여러 일들을 다 해봤어요. 노가다도 하고 서빙도 하고, 친구들이랑 한 해를 날려본 거예요. 근데 문제는 그러고 나서 복학을 하니까 공부했던 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또 일이 벌어졌어요. 공부를 잘하던 1년 후배 하나가 학교에서 목숨을 끊었는데 말 그대로 의문사.

그때 생각이 들었죠. 왜 학교를 다녀야 하나. 좋은 대학이 필요할까? 

대학 입시가 코앞인 3학년 2 학기였는데 매일 자율학습을 빠져나가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어요. 그리고 연극을 시작하게 됐죠. 

휴학계라는 선진문화를 고등학교에 도입했던 종길님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연극으로

종길 님은 교육제도에 대한 많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에 못 이겨 지원한 부산의 어느 대학에서 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부산에는 중앙동을 중심으로 연극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종길 님도 그곳에서 고등학교때 즐거움을 느꼈던 연극판에 실제로 발을 들이게 된다.

당시에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왜 드셨어요? 

연극단에 지원할 때 그 얘기를 했는데, 나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서 그걸 표현하고 싶다고 했어요. 근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워낙 가난한 게 연극판이다 보니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요. 46일 동안 연극하고 받은 게 책 두 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무대에 있는 동안은 너무 좋더라고요.

그러다 더 이상 소진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쯤 부모님이 계시던 목포로 돌아갔어요. 군대를 가야 된다는 핑계도 있었는데, 연극을 하다 보니 내가 세상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태 제대로 해본 공부도 없고. 늦게나마 지식에 대한 욕망이 샘솟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1년간 목포 도서관에서 살면서 하루 종일 책만 읽었어요. 

어떤 책을 주로 읽으셨는데요?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은 구약성서. 그걸 시작으로 어떤 종교도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사실 종교책들이 가장 대단한 문학이거든요. 그렇게 한동안 푹 빠져서 글을 읽고 쓰고 하는 게 하루 일과였어요. 러시아 문학, 프랑스 문학, 미국 문학, 중국문학, 남미 문학 등등 닥치는 대로 하루 종일 1년간 책만 읽었죠. 신기하게 갈증이 해소되더군요. 그리고 군대를 다녀왔죠. 

병상에서의 1년

군대 다녀오시고는 어떤 걸 하셨어요? 

잘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제대 2주 전에 큰일이 생겼어요. 25살 나이에 제대를 하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가기로 한 상태였는데, 휴가를 갔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난 거예요. 너무 심하게 사고가 난 바람에 의사는  못 걸어 다닐 수도 있다고 할 정도였어요. 말 그대로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 이대로 끝났으면 싶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정말 그러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버티셨는지 궁금해요.

6개월 간 재활치료를 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누워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전부였어요. 배우로서 생각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 방법밖에는 없었던 거죠. 그렇게 쓴 몇 개의 시들을 목포에서 국어교사를 하던 시인한테 보냈어요.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때는 어느 정도 걸어 다닐 수 있던 때라 시내에 만나러 나갔죠. 

뭐라고 하시던가요? 

갑자기 대뜸 젊은 친구가 왜 이렇게 허무주의 글을 쓰냐고 묻는 거예요.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어요. 금방 한 시간이 지나버렸고 좋은 친구를 만났으니 곡차를 마시러 가면 어떻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목포 문인들이 다 모이는 자리에 합류하게 됐죠. 무슨 차를 마시러 가는 줄 알았는데 곡차가 막걸리더라고. (웃음) 그렇게 마음 맞는 분들을 만나서 삶의 의미를 겨우 찾아가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또 두 번째 사고가 났죠.

두 번째 사고요? 

이제 좀 회복해서 6개월 만에 걸어 다니게 됐는데, 또 사고가 났거든요. 그렇게 6개월과 6개월, 1년을 꼼짝없이 병상을 오가며 치료하며 보냈답니다.  

와. 진짜 절망적이지 않으셨어요? 

우선 배우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죠. 배우는 신체로 감정을 표현하는 직업이라 몸이 불편하면 감정을 담아내질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 몸으로는 다시는 못하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도 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있지 않으셨어요?

혼자 쓰기는 쓸 수 있어도 문인으로 활동하기 좋은 때는 아니었어요. 내가 쓰는 시들은 주로 상징주의를 기반으로 했는데 그때 주류였던 계몽적인 사실주의와는 전혀 맞지가 않아서 그쪽으로 가 볼까 하는 생각을 못했죠. 어쨌든 연극도, 글도 내 밥벌이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책 없이 복학하게 되거든요.

‘목포는 항구다’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목포 시낭송회 간지…

 

7번의 창업, 6번의 흥망.

늦은 나이에 2년이나 남은 대학생활을 하셨겠군요. 

그렇죠. 그래도 학교 밖에서 부족했던 공부를 채워오니 학교생활은 꽤 쉬웠어요. 논술형 시험들이 나오면 가장 반가웠죠. 

대학교 졸업여행(라고 쓰고 여대를 다니셨는지 궁금해지는)

그렇게 순탄하게 졸업하나 싶었는데 그때 IMF가 오더라고요. 입사를 했던 친구들도 회사 부도 때문에 어느 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죠. 나는 부도 때문에 잘린 건 아니지만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 것이 하고 싶은 생각만 자꾸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6개월 정도 회사생활을 하고 29살쯤 첫 창업을 했죠.

IMF에 창업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내 성향 자체가 실패하더라도 ‘해보고 실패하자’ 주의라서 겁이 안 났던 것 같아요. 안 해본 게 없어요. 문화예술 정보 게시판, 광고 기부사업, 동영상 강의, 여행사 등등 그리고 마지막에 했던 게 여기 합류하기 전에 했던 웨딩 플랫폼 사업이었어요. 모두 다 IT를 기반으로 했지만 다 잘 된 것도 아니었고 실패가 더 많았죠. 그래도 다행히 지치지는 않더라고요.

 

최소 사업계의 천수관음(?)

그래요? 어떻게 실패하셨어요? 

재밌는 것이 불행은 항상 긴장을 놓는 순간 찾아오더라고요. 동영상 강의 사업을 했을 때 얘기를 하자면, 전국 학생들이 4만 5천 원짜리 CD만 사면 시간당 200만 원짜리 강남 고액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서비스였어요. 한국이 어떤 나란데. 교육열이 대단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빠르게 잘 됐었어요. 서울대 구술면접을 분석해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죠. 방송도 타고 어마어마한 투자자들이 사방에서 연락이 올만큼 대박이 났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잘 될 것 같으니까 공동 창업자들끼리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더라고요. 그렇게 서로 욕심만 주장하다 보니 신뢰관계가 완전히 깨져버렸어요. 그 뒤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리죠. 그때 당시의 우리와 경쟁했던 회사가 지금의 메가스터디였어요. (웃음)

여행서비스는요?

여행 산업은 아는 선배가 차린 여행사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하게 되는데요. 그 전까지만 해도 여행의 ‘여’자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때 여행사 오퍼레이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많이 배웠죠. 

여행사 시절 치앙마이에서

점차 일이 쉬워지는 어느 순간 인도네시아 발리 여행 패키지 프로그램을 짜서 납품하는 사업을 하면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또 회사를 차리죠. 그때가 2003년쯤인가 겨우 현지 사무실을 차리고 잘해보자 하며 건배했던 날, 발리에 폭탄테러가 터져요. 6개월 동안 예약되어 있던 건이 모두 캔슬. 시작도 하기 전에 접을 수밖에 없었죠.

진짜 그건 예측도 못한 일이겠네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이건 우리 보고 여행업은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다. (웃음) 그리고 생각이 든 게, 이런 위험을 감수할만한 자본력이 없으면 못하겠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그래서 검색을 하죠. 로봇이 모든 일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와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업은 무엇일까 하고요. 

 

로봇 시대가 와도 사라지지 않을 산업

그게 뭐였어요? 

그게 바로 웨딩 사업이었어요. 심지어 6.25 때도 결혼식을 했더라고요. 

사랑과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앞으로 이 분야만 팔거라고 결심했어요. 처음에는 웨딩 커뮤니티 포털 사이트를 운영했는데요. 그때가 플래너라는 게 처음 생길 때라 업체들이 광고를 할 곳조차 많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빠르게 잘 됐죠. 서른셋쯤이었나. 근데 광고 수급에 달려있는 매출이라 변동성이 너무 크더라고요. 그래서 이 산업에서 필수적인 요소를 디지털화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로도 웨딩커뮤니티, 다음 웨딩(MCP), 웨딩쿠폰 등 다양한 O2O 플랫폼 사업을 하다가 각 웨딩업체들의 CRM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웨딩컨설팅 ERP, 웨딩드레스, 웨딩스튜디오, 한복, 예물 업종들의 CRM을 개발했죠.

어떻게 보면 하우투메리가 가진 비전과 비슷하셨네요. 

그렇게 볼 수 있죠. 그래서 8년 동안 하다가 상돈 님을 만났고 뜻이 잘 맞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웨딩산업에만 18년을 있었네요. 

생각해보면 종길 님이 하신 사업 중에 가장 길게 몸 담으셨던 산업이네요.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다이내믹하고 재밌는 곳이더라고요.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있고요. 그리고 하우투메리에 합류하고 나서는 큰 명분이 생긴 것 같아요. 이 웨딩산업에서 내 뒤를 이을 세대를 만난 거니까요. 거기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것도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하우투메리의 웨딩북 청담

그럼 이제는 어떤 꿈이 있으세요? 

우선 하우투메리의 친구들에게 더 큰 기여를 하는 게 목표고요. 결혼 준비하는 고객들이 결혼비용 걱정 없이 행복하게 결혼 준비할 수 있는 사회도 만들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내가 가진 장점을 살려서 그곳에 사는 분들과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여태 너무 다이내믹하게 살았나 봐요.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여유로운 자연을 벗 삼아 돈키호테처럼 살려고요. 그때 놀러 오세요. 

<돈키호테>, 피카소

6화. ‘돈키호테와 마시는 고량주의 맛’, 김종길’ 끝

​데이나 (외부필진)
H모 스타트업 대표분과 차를 한 번 잘못 마시는 바람에 1인 식당인 하메식당을 매주 열고 있습니다. 음식과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요리도, 글도 개인의 세월을 담아낼 만큼 맛있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