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보다 중요한 건 매일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 – 하메식당 4화

하메식당: WE ALL HAVE A STORY TO TELL
행복의 순간을 만드는 사람들, 하우투메리 멤버 한 사람을 위해 열리는 식당입니다. 매주 목요일 하루, 저녁 7-9시의 식사만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음식과 피플 다큐멘터리, 하메식당을 시작합니다.

 

 

4화. 치아바타도 맥주와 함께라면 씩씩해진다, 강동지

 

 

 

치아바타라는 이름의 빵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큰 기대는 금물. 맛이 참 단순 밋밋하기 때문이다.

그 맛을 표현하자면 멋쟁이 크로와상처럼 입에서 살살 녹지도 않고 그렇다고 크림빵처럼 추억을 되새기게 하지도 않는다. 특별히 진한 맛도 없으며 아름답다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것이 이 녀석의 현실이다.

얼마나 흔하고 만만한 모양새였으면 그 낭만 넘치는 이탈리아에서 ‘슬리퍼’로 불렸을까.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세상에서 제일가는 빵을 고르라면 어떤 망설임도 없이 치아바타를 꼽는다. 그 진솔하고 착한 마음이 좋아서다.

밋밋한 맛이라고 하지만 씹을수록 달아지며 어떤 국물이나 소스에 묻혀 먹어도 잘 어울린다. 특히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그릇까지 핥아먹고 싶을 만큼 너무 맛있는 음식을 만나면 바로 그때가 치아바타의 착한 희생이 빛날 때다. 그를 작게 찢어 그릇을 닦으면 나의 야만스러운 모습을 교양 있게 숨길 수 있으므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마침 조금 시원해진 초가을 날씨였다. 이런 날 맥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큰 범죄라고 어린 날 엄마가 그랬다. 당연히 20살이 되면 다 아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날 마침 향이 강하고 맛이 진한 맥주가 들어왔고 함께 곁들일 심심한 안주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심심한 치아바타 생각이 번쩍.

아직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지 못해 답장이 없는 네 번째 손님에게 답장을 보냈다.

“치아바타 피자에 생맥주 한잔, 어때요?”

 


 

다짜고짜 맥주 마시자고 해서 놀라셨죠? 뜬금없는 안주 강요도.

아니에요.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던 걸요. 아. 치아바타 피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만 했어요. 근데 이렇게 존재하는 거였네요.

네네. 맥주랑 잘 어울려요. 한번 드셔 보세요.

넵 감사합니다. 오늘 어떤 얘길 할지 몰라 생각이 많았는데, 먹으면서 대화한다고 생각하니 좀 편하네요.

맞아요. 그냥 식사하면서 편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럴게요. 근데 이거 방금 나와서 그런지 되게 맛있는데요.

다행이다. 그럼 이 틈에 급 질문. 자기소개해주세요.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요. 음 지금 하우투메리에서 B2B 사업 팀장을 맡고 있는 강동지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 웨딩시장 내 다른 분야의 사업자들에게 세일즈를 하는 일을 해요. 인터뷰하려고 보니 벌써 입사한 지 2년 정도가 되었더라고요. 덕분에 회사 내에서는 꽤 OB에 포함되고 있습니다(웃음)

# 브레이크가 필요했던 나의 첫 세일즈 

재훈 님(3화 주인공)이 동지님 칭찬을 그렇게 하던데, 그렇게 세일즈의 신이신가요?

으악. 아니에요. 재훈 님이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셔서 그런 유언비어를 믿으시는…. 예전에도 제가 세일즈 일을 해서 그런 오해를 받는 것 같아요.

아. 하우투메리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데요?

카드 영업이라고 하죠. VIP카드 세일즈를 했어요. 졸업을 반학기 남겨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만큼 힘들었어요, 무작정 콜드 콜 하고 무턱대로 찾아가는 돌방(돌발 방문의 줄임말)이 일상이었어요. 그날 한 약국을 타겟으로 잡았으면 그 약국 앞에 찾아가서 카드 가입해달라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있고 그랬죠. 그때는 선배들이 그렇게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던 것 같아요. 한의원 같은데도 찾아가곤 했는데, 침 한번 맞는데 5천 원이거든요. 10번쯤 가면 젊은 친구가 뭘 하길래 대낮에 침을 맞나 싶어 의사 선생님이 물어보세요. 무슨 일 하냐고. 그러면 그제야 “아 저 카드 팝니다.”하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 안쓰러워 그러셨는지 보통 가입해주시거든요.

그걸 몇 년 하신 거예요?

한 일 년 했었어요. 사실 그걸로 급여가 좀 괜찮았거든요. 수당제라 거의 많이 벌 때는 월에 천만 원도 벌어보기도 했어요. 직접 영업으로 따오거나 리쿠르팅을 해서 팀을 꾸리면 팀원들의 수당의 몇 프로를 받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정신없이 벌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일 년 만에 그만뒀죠.

무슨 계기가 있으셨던 거예요?

어머님이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사정을 하셨어요. 그때가 제가 27살밖에 안됐었거든요. 근데 그 어린 나이에 감당이 안 되는 액수의 돈을 버니까 철없이 행동하고 그랬어요. 기고만장했던 거죠.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어머님이 크게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하루는 “그런 일은 언제나 할 수 있지 않냐.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인생에서는 더 중요한 것들이 많으니 그걸 찾았으면 좋겠다.” 고 하시더라고요. 

때마침 저 자신도 브레이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그만뒀죠. 

그래도 아쉽진 않으셨어요? 그 정도 성과급이면 되게 인정받는 직원이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아쉬웠죠. 당장 수입이 확 줄어드니까. 근데 좋은 게 더 컸어요.

대학 때부터 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카드 영업을 시작하고는 연락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잖아요.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연락을 해도 상대방에게는 부담을 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이랑 떳떳하고 기분 좋게 연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요.

 

# 백과사전이 유일한 친구였던 어린 시절

타고난 세일즈맨이셨을 것 같지만 지금 저에게 느껴지는 동지님은 안 그렇거든요. 혹시 어릴 땐 어떤 아이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음 그때랑 제 어린 시절을 비교하면 극과 극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거예요. 정말 소심한 아이 었어요. 친구도 별로 없었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해서 매일 백과사전을 읽는 게 취미였던 아이였거든요. 근데 좀 특이한 게 어떤 주제를 찾아서 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읽는 거예요. 어릴 때 역사, 천문, 천체 이런 주제들이 너무 재밌었거든요.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그게 훨씬 좋았어요. 낯가림도 꽤 심해서 폐쇄적일 만큼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랑은 완전 딴판인데요. 무슨 이유가 있으셨어요?

사실 어렸을 땐 작고 왜소해서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그래서 더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면 집이 어려워서 더 그랬는데요. 딱 IMF 시절이라 안 어렵던 집이 없을 것 같긴 한데 저희 집도 그 중 하나였어요.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해서 단칸방에서 살게 되었고 그렇게 힘든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니 빨리 철이 든 것 같아요. 첫째 아들에, 장손에 그런 많은 이름들 때문에 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집안이 그렇게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전교회장도 하고 막 그랬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린 제가 감당하기 힘들었던 무게였던 것 같아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애썼던 거네요.

네. 사실 사는 게 힘든데 두 분이 웃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제가 성적을 잘 받아가거나 상장을 가져가면 그때는 웃으셨거든요. 딱 그거였어요. 두 분을 웃게 하려고.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전기기술자신데 가끔 주말에 아버지 따라 놀러 가면 동료분들한테 제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우리 아들이 전교회장이고 성적이 어떻고 하면서요. 그럴 때 뿌듯했죠.

근데 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제가 대학을 가면서 완전히 송두리째 변했어요.

 

# 제도권 사회에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배우다

어떻게 변했길래요?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운동권 선배들을 알게 되고 입학한 해부터 데모를 엄청 했어요. 등록금 투쟁부터 시작해서 한미 FTA 반대 투쟁, 미군, 대선 등등. 그때는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넘쳤던 것 같아요. 수염도 덥수룩하게 길러서 헤어밴드로 묶고 다니고.

그 당시에 지하철에서 부모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황하셨는지 정말 모르는 척하시더라고요. 20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던 일탈을 아주 세게 몰아서 했죠. (웃음)

부모님이 놀라셨던 꽁지머리+수염 크로스

그렇게 열심히 데모를 하게 된 이유가 있으세요?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카트라는 영화 보셨어요? 홈에버라는 마트의 여성노동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거든요. 그게 제가 2007년에 실제로 데모했던 사건이었어요. 어느 날 비정규직 어머님들이 부당해고를 당해서 투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학교에서 본 거예요. 굉장히 화가 났죠. 왜냐하면 저희 어머님이 방직공장에서 20년간 일하신 노동자시거든요. 급여가 얼마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게 아주 부당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럼 동지님께는 사회적인 문제라기보다 개인적인 사건처럼 느껴졌겠어요.

그렇죠.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거예요. 제가 고향이 대구인데 그날로 선후배들을 모아 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갔어요. 근데 저희가 데모를 하러 온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이틀 동안 구금시켜버리더라고요.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심지어 다른 학교 학생회분들이나 홈에버 노동자분들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니까요. 제 과거 중 큰 부분이죠.

스무 살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신 거네요.

네. 어릴 땐 부모님이 기뻐하는 걸로만 행복을 찾다 대학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배운 거죠. 불의를 보면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거. 한마디로 실천하는 지성인이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가치지향적인 삶을 그때 알게 됐죠. 그래서 지금도 후회는 안 해요. 때문에 벌금도 꽤 맞고 그랬지만요. (웃음)

 

# 지구 반대편에서 겪었던 아픔과 성장

그런 대학시절을 보내고 카드 영업을 하시다가 서울로 올라오신 거군요.

아 거쳐온 곳이 한 군데 더 있어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갔었거든요. 시작은 심하게 단순했어요. 제가 커피를 좋아해서 카드사를 그만두고는 거의 대부분 카페에서 일을 도왔거든요. 그러다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근데 그 친구가 갑자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기에 무지 서운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이 서른에 말도 안 되는 일을 결심했죠.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채로 그 친구를 따라가겠다는 결정을 했어요.

저는 교환학생도 힘들었는데, 대단한 결심이신데요?

아무것도 몰라서 용감했던 것 같아요. 그 친구도 괜찮은 친구라는 믿음이 있었고요. 근데 크게 배신을 당했죠.

저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니 의지할 곳은 그 친구뿐이었는데, 차를 가지고 주 2~3회씩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거예요. 차가 없으면 움직이지를 못하는 곳이니 항상 갇혀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외로웠죠. 집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서 한국 예능만 보고 있는 현실이 너무 답답했어요.

말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네. 결국 얘길 꺼냈죠. 그렇지만 배려하는 마음없이 서로 서운한 감정만 가득 쌓인 상태였어요. 대화가 이어지질 않더라고요.

심지어 그 친구는 사실 오로지 종교활동을 하기 위해 호주에 왔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충격이었죠.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었는데,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진 상황. 답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그 넓은 호주에서 헤어졌죠.

아니 가기 전에 좀 미리 얘기해주시지…

하하..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무튼 그러고 그 친구가 갑자기 한국을 들어가 버렸어요. 당연히 저는 혼자 덜렁 남겨졌죠. 제가 온 이유는 오로지 그 친구랑 함께 있기 위한 거였는데, 그게 아예 사라진 거예요. 그럼 돌아가야 하는데 심지어 돌아갈 용기도 안 나더라고요.

왜요?

자존심이 너무 많이 상한 상태였어요. 그제야 그 친구 하나만 보고 온 제 자신이 너무 싫더라고요. 지금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지금까지 도움되는 일을 해온 게 하나도 없는 것도 너무 화가났어요.

사실 20대의 저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거든요. 대학시절 내내 옳은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고, 영업일을 할 때도 누구보다 잘해왔어서 저에 대한 믿음 같은 게 있었어요. 그리고 착한 아들, 착한 선배로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게 행복이었던 사람이었는데 어떤 누구와도 상호작용이 없는 그런 환경에 놓이니까 그냥 나락으로 떨어지더라고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별의별 생각을 다했죠.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시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도 해보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일을 구하려고 하신 거예요?

네. 우선 이력서를 써서 구글 번역기를 다 돌린 다음에 500장을 뽑았어요. 영어를 쓰지 않으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리스타 일 밖에 없더라고요. 그리고 퍼스라는 지역 모든 카페에 이력서를 넣었어요. 한 일주일은 계속 이력서만 넣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처음 이력서를 준 카페에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전화를 받았지만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어요. 그냥 목소리가 좀 긍정적인 것 같아서 ‘아 오라는 거구나’ 싶었죠 (웃음) 예스, 예스만 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갔더니 그냥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거야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기계처럼 했죠. 그렇게 8개월 동안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거기서 일했어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돈도 벌면서 영어도 조금씩 느셨을 테고.

그렇죠. 확실히 진짜 많이 배웠어요. 원래는 커피만 열심히 만들 자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주문도 받아보고 싶고 단골이랑 대화도 해보고 싶고 그렇게 하나하나 욕심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영어책을 구해서 공부도 해보고. (웃음)

그리고 흔히 말하는 저녁이 있는 삶이 정말 좋았어요.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서 낮 3시에 퇴근했는데 마치면 서핑을 하러 가거나 친구들이랑 랍스터 잡으러 다니고 그랬죠. 1년 정도 그렇게 호주에서 시간을 보내고 왔어요.

 

# “형. 스타트업이 뭐예요? 저 스타트업이 뭔지 몰라요.”

그렇게 이제 막 정착하고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하셨을 텐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네. 말씀하신 대로 영어를 조금씩 하기 시작해서 재미는 붙었지만, 성장의 욕구가 온전히 채워지지는 않았어요. 호주 생활의 시작점이 불행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존감이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원활하게 소통하는 모국에 가서 제대로 된 커리어 성장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답은 딱히 없었죠. 이미 서른한 살이었고, 쉰 기간도 꽤 되니까 한국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우투메리에 오시게 된 거예요?

그때 하우투메리에 저를 소개해준 형이 있는데, 호주에 있을 때부터 이런 고민들을 상담했어요. 지금도 스타트업 경영진으로 있는 형이고 저에겐 정말 귀인이에요.

자존감이 아주 낮았던 그때 형은 네가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용기를 가지게 해 줬죠. ‘너 사람 만나면 커뮤니케이션 잘하잖아.’ ‘너는 무기가 있어’ 이런 말들로요. 그래서 이제 진짜 한국에 돌아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욕구가 커지더라고요.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 돌아오기 딱 한 달 전쯤이었어요.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카톡으로 형한테 전화가 오더라고요. 웨딩 관련 이런 스타트업이 있는데, 너 한번 해볼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처음 물어본 게 “형 스타트업이 뭐예요? 저 스타트업이 뭔지 몰라요.” 였어요. (웃음)

저 정말 알아요. 지방 출신으로 스타트업 세계를 알기가 쉽지 않죠.

데이나 님도 지방 출신이셨구나. 근데 지방에서 대학까지 나오면 정말 알기 쉽지 않거든요. 지금도 제 후배들 만나면 이해시키는데 꽤 걸려요. (웃음) 저도 사실 알았던 건 아니었죠. 대충 서울에 있는 벤처기업 같은 거라고 듣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길래 그냥 만나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귀국하는 날 선정릉역 카페에서 바로 상돈 님(하우투메리 대표)을 만났죠.

그렇게 일하게 되신 거군요.

처음에는 순탄치 않았어요. 제가 맡으려고 들어왔던 인수건과 사업이 출근한 지 2주 만에 드롭 됐거든요. 제 입사의 이유가 사라진 거죠. 그리고 조직에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하우투메리에는 항상 정해진 채용 순서가 있는데, 형의 추천으로 들어온 거라 직원분들과 함께 하는 문화 면접을 안 봤거든요. 그래서 당시 같이 일하셨던 분들이 좋은 시선으로 봐주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알기에도 문화면접이 핵심이던데, 소위 ‘낙하산’처럼 여기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보는 것 같더라고요. 실제로 아닐진 모르지만 저는 서운함도 느끼고.

제가 3일쯤 됐을 때 점심시간 전에 잠시 담배를 태우고 올라왔는데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엄청 서운하더라고요. 근데 우스운 건 한국에 돌아온지도 얼마 안 됐고 서울도 처음일 때라 괜히,

‘아 서울 샌님들이랑 일 같이 못하겠다. 개인주의들~’  막 이렇게 생각했죠 (웃음)

ㅂㄷㅂㄷ by 지방 사람

그때는 회사 성장기라 상돈 님도 온보딩 해주실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달라지셨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ㅠㅠ

 

#제대로 된 첫 업무, 최악의 동료를 만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고 그제야 제대로 된 업무가 주어졌어요. 그때부터는 제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했던 것 같아요.

어떤 일들을 하신 거예요?

이건 영업상 기밀이라 자세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웃음) 웨딩 산업 전체에서 아주 큰 부분인 웨딩 홀에게 제공하는 B2B 서비스를 세일즈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서울 전역의 웨딩홀을 누비고 다녔죠. 그전까지는 서울 지리를 하나도 몰랐거든요. 근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웨딩홀 이름만 대면 지도에서 어딨는지 바로 가리킬 수 있어요. 그만큼 저에겐 절실했고 몰입해서 일했던 시간이었던 거죠.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에 일이 주어지고, 하나씩 성과를 내게 되니까 즐거운 마음이 컸겠어요.

그렇죠. 이게 막 칭찬을 바라는 것도, 인정을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웨딩 홀 수 하나를 늘리기 위해서 정말 제 사업처럼 일했던 거 같아요. 마치 제가 상돈 님이 된 것처럼 했어요. 그때가 정말 힘들긴 했는데 많이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진짜 밑바닥부터 했었거든요. 왜냐면 기존 웨딩사업군에서 웨딩홀과 저희는 갑을 관계도 아니고 갑과 정정도랄까? 어느 정도로 힘들었나면. 어떤 웨딩홀에 가서 설명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설명하는 내내 앉으라는 이야기를 안 해서 서서 설명한 적도 있어요. 어떤 곳은 전화를 받으면서 듣겠다고 해서 통화하는 사람 앞에서 설명을 했던 적도 있고.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하루에 여섯, 일곱 군데 미팅을 잡았었거든요. 인천에 있는 곳으로 미팅을 나갔다가 욕심이 나서 1박을 하고, 또 욕심이 나서 2박 3일을 집에도 안 들어가고 미팅만 했었던 적도 있어요.

어떤 분이랑 팀으로 하셨던 거예요?

해진 님이요. (하우투메리 사업개발이사) 그래서 그런지 해진 님과 정이 많이 쌓였었어요. 전우애 같은 거 있죠? 힘들 땐 같이 술도 마시고.

케미는 어떠셨어요? 어떻게 보면 일을 같이한 서울 사람은 해진 님이 처음이셨을텐데.

해진 님은 한마디로 최고의 동료이자, 최악의 동료예요. 먼저 최악부터 설명하면,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거든요.

우선, 도저히 이 사람의 체력을 못 따라가겠는 거예요. 분명 저랑 새벽 1시까지 같이 술을 미친 듯이 먹고도 칼같이 출근해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서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회사 일찍 와서 책 한 시간 읽고, 오늘 업무 리스트 정리하고. 2년 동안 제가 아는 선에서는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는 걸로 알아요.

해진님이 로봇이다에 한표

진짜 동료로서는 최악인데요?

그러니까요. 해진 님한테 말하죠. 아 우리 진짜 스타일 다르다고 (웃음) 그런데도 최고의 동료인 이유는 이런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제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멘토 같은 사람이거든요. 비즈니스 마인드부터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또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해진 님이 주는 자극들로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지향점이 되어주는 동료겠네요.

딱 맞는 말이에요. 2년이 되었는데도 계속 해진 님께 배울 점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최악의 동료이자 최고의 동료예요.

진짜 복이 많으세요. 그런 동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맞아요. 저를 동기 부여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감정적으로 유대관계를 느끼는 친한 사이기도 해요. 해진 님은 꼭 ‘우리’라고 표현해주거든요. 그렇게 정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이 동료로 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감사하죠.

 

#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이 함께할 때

그럼 지금 제가 보는 단단한 동지님은 하우투메리에서 다시 찾은 모습이시군요.

네. 세일즈가 워낙 바로 성과가 나타나는 업무니까. 웨딩 홀 고객이 하나씩 늘어가고, 절대 안 될 것 같은 곳도 제 노력으로 고객이 되었을 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 생겨요.

그걸 시작으로 업무가 확장됐어요. 입사하고 2년간 6개월 정도 텀으로 새로운 사업을 계속 맡았어요. 그렇게 주어지는 업무를 피하지 않고 회사가 필요한 제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제 바운더리가 넓어지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이것도 해진 님이 해주신 말 중에 딱 어울리는 말이 있어요. 고통 없는 성장이 없다고. 그렇게 성장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참 공감해요.

본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하우투메리 멤버들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저를 많이 찾더라고요. ‘동지님 어떻게 할까요?’ ‘이거 아세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요. 그래서 조금씩 나름대로 제 영향력을 성장시키고 있는 지금이 행복해요. 이렇게 한 분야씩 정복해서 성장하다 보면 저도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한 꿈도 가지게 되고요. (웃음)

어떻게 보면 동지님은 회사와 개인의 성장이 하나의 결에 있는 것 같아요.

네. 그래서 굉장히 감사한 조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중한 곳이고요.

가끔 미팅이나 회의해서 제가 하는 말이 있는데, 저는 상돈 님보다도 더 회사를 사랑한다고 얘기해요. 뭐 현실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음) 어쨌든 제가 다시 시작할 기회를 부여받은 곳이고, 그만큼 열심히 배웠고 실망도 했고 아프기도 했지만 결국은 성장할 수 있게 한 곳이죠. 이렇게 하우투메리를 떠올리면 복합적인 감정이 동시에 들어요. 그걸 다 합하면 ‘소중한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남는 것 같아요.

소중한 하우투메리에서 동지님은 바리스타

 

# 인생의 다음 막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요즘 동지님의 최대 관심사는 뭔가요?

아 저 결혼 준비하고 있거든요. 올해 2월이 예정이라 한창 바쁘게 준비 중이에요.

아니 잠시만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비운의 남자 아니셨어요?

제가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그 전 여자 친구가 가고 한 달 사이에 호주에서 지금 여자친구를 만났어요. 만난 지는 3년 정도 되었네요.


내가 지금 누굴 동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어떻게 만나셨어요?

퍼스에서 카페 알바를 마치고 드라이버 일을 해보려고 면접을 갔는데, 면접관으로 이 친구가 나왔어요. 정말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다시 큰 힘을 얻었죠. 그리고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네요.

동지님이 보는 여자 친구는 어떤 분이세요?

정말 능력이 많은 친구예요. 글을 참 잘 적어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데요. 개인 브런치에 글도 꾸준히 적고 있어요. 최근에는 직방에 후기글 경진대회에서 1등을 해서 1년 치 월세도 타고. 저에겐 한없이 자랑스러운 친구죠.

어떤 글을 쓰시는데요?

생활밀착형 글이라 저도 가끔씩 등장해요. 에세이라고 할까? 여자 친구의 본업은 따로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 친구가 퇴사하고 자기 꿈을 이루는데 시간을 더 썼으면 좋겠어요. 저도 여자 친구 글 읽는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 능력을 응원해주고 싶어요. 제가 좀 더 노력하면 되니까.

어떻게 보면 이제부터는 한 사람과 함께 삶을 꾸려나가시는 거잖아요. 두 분만의 계획이 있으세요?

네. 있어요. 특별한 계획이랄 건 없지만 외국에서 만난 인연인만큼 결국에도 함께 나가서 살고 싶어요. 그런 목표로 더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 같아요. 지금 좀 힘들어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참을 수 있으니까. 그 약속을 실현하는 날을 꿈꾸고 있어요. 서로가 각자 원하는 형태의 삶을 충실히 살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았으면 해요.

요즘 한창 바쁘실 때 겠어요.

네네. 정말요. 챙겨야 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결혼준비를 쉽게 해주는 하우투메리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합니다 (웃음)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날씨에 딱 맞는 맥주와 치아바타는 편안한 자리를 만들기 충분했고. 낮지도 높지도 않은 동지님의 목소리가 식당 전체의 온도를 살짝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긴 시간동안 착한 미소를 마주한 나는 왠지 마음까지 깨끗해진 기분이 들었다.

잠시 밖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앞서 나눴던 얘기들이 다시 떠올랐다. 동지님의 대학시절, 어머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돈보다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어머님의 걱정이 바로 해소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강한 브레이크로 멈춰 섰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들을 손 쉽게 바로 발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무턱대로 호주로 떠났다 세상에 혼자가 된 기분을 느꼈으며,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며 간절하게 시작한 회사에서는 시작 하나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렇게, 분명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이라는 그만의 방향을 찾게 되었고 그는 지금도 성실히 달리는 중이다.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웃는 그를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싶었던, 그리고 하얀 치아바타가 참 씩씩하게 보였던 밤.​

​데이나 (외부필진)
H모 스타트업 대표분과 차를 한 번 잘못 마시는 바람에 1인 식당인 하메식당을 매주 열고 있습니다. 음식과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요리도, 글도 개인의 세월을 담아낼 만큼 맛있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