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s story (1)] 퇴사하겠습니다.

 

소속 본부의 리더와 마주 앉으며 주문을 외우듯 생각했다. 퇴사 그게 뭐 대수라고. 처음 한 번이나 어쩔 줄 몰라 절절매지 이거 뭐 별것도 아니네, 괜찮아. 호기로운 생각을 밉지 않은 말로 포장하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데 반갑지 않은 기운이 슬며시 올라왔다.

 

급성 목구멍쫍아짐증후군. 이 기분은 가슴에서 묵직한 것이 나오기 직전 병목현상이 생기면서 느껴지는 그것 아닌가. 아 뭐야, 왜 이러지.

 

이내 고장 난 로보트 귀신이 씌인 사람처럼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 양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저 물 좀 마시고 올게요를 세 번 반복한 후에야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퇴사 결심은 정말 어렵지 않았다. 돈벌이가 필요 없어서도 아니고,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만치 구직이 쉬워서도 아니었다. 반드시 이 타이밍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

 

우리 회사는 정말 괜찮은 곳이다. 좋다고 하기엔 ‘좋음’의 기준이 너무 제각각이라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착하고 똑똑한 회사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구성원의 시간과 생활을 쥐어짜지 않는 ‘건강하게 일하기’를 잘 지키고 있다. 대신 근무 시간 동안 업무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며 시도한다. 성장세를 유지하면서도 하루의 일 에너지를 아낌없이 모두 소진하고 가뿐한 맘으로 퇴근하는 워라밸 지키기. 착하기만 하거나 똑똑하기만 해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이 일을 열심히 해내는 중이다.

 

괜찮은 회사와 좋은 동료들을 두고 나는 떠나야겠다고 말하는 것이 몹시 미안했다. 반년 가까이 준비해온 서비스를 8월이면 오픈하고 하반기에는 좋은 지표를 뽑아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에, 아쉬움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컸다.

 

주책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연신 콧물로 뽑아내며 부산을 떠는데 리더가 물었다. 일을 놓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는 그것을 하고 다시 돌아오면 되겠다고, 돌아오면 또 같이 잘해보자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물 안 꼰대만큼이나 끔찍하게 싫은 것이 염치를 모르는 인간인지라, 생각은 했지만 차마 염치 없이 제안할 수 없었던 말들이 그에게서 이어졌다.

 

누구에게나 짧은 숨표보다는 조금 더 긴 쉼이 필요할 때가 온다고. 지금 우리 중에선 당신에게 먼저 찾아온 것뿐이라고. 그럴 때마다 회사를 떠나야만 한다면 회사야말로 손실 아니겠냐고. 이참에 회사와 구성원들을 위한 좋은 문화로 발전시켜보자고.

 

그리하여 얻게 된 석 달의 휴가. 8월까지 일을 조금 더 돕고 9월부터 잠시 휴직을 하기로 했다.

 

무엇을 할지는 진작 정해놓았지만 (그래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니까) 어디에서 할지는 아직 고민하고 있다. 회사 동료 중 한 명이 태국의 꼬따오를 강력히 추천했지만, 꼬따오 받고 스페인! 을 외친 다른 동료의 꾐에 빠져 바르셀로나에서 한달살기를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유력하다.

 

빨리 9월이 왔으면 싶다가도, 이 미친 더위의 한복판을 천천히 빠져나가며 하루하루를 느끼고 싶은 생각이 마음을 붙잡는다. 쉼의 시간 동안 고장 난 커튼을 수리하면, 마침내 내 인생의 2막을 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그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기에 말이다. 그런 다음 시원하게 커튼을 걷어내고 새로운 3막의 시간을 누비며 다닐 것이다. 무엇에도 빚진 마음 없이 하루하루를 온전히 살아내야지. 이 시간을 잘 지나고 나면 나는 나를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 * 퇴사 결심에 굳이 돈이나 구직 이야기를 한 것은 그것이 ‘직업’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어서는 아니다. 다만, 그만두기로 결정할 때 항상 마지막까지 구질구질 붙잡으며 치사스럽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